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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나혜석의 그림과 여성 의식 – 시대를 앞서간 붓끝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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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 여성의 삶은 철저히 가부장적 체제에 의해 규정되었고, 예술은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혜석(1896~1948)은 화가이자 작가, 사상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인물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 여성 화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그녀는 여성의 주체성과 인간다운 삶을 그림과 글로 외쳤다.

나혜석의 예술은 단순히 ‘회화’로만 보아서는 그 깊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시대의 벽에 도전하는 강한 여성 의식이 녹아 있다. 이 글에서는 나혜석의 그림과 여성 의식이 어떻게 연결되며, 그 의미가 오늘날에도 어떤 울림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나혜석, 시대를 앞서간 여성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당대 조선에서는 드물게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으로, 학문과 예술,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루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문학에도 능하여 1914년 발표한 단편소설 「경희」에서 여성의 사랑과 자유를 그렸다. 이 소설은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으며,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경희의 외침은 곧 나혜석 자신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 이혼, 사회적 비난, 경제적 파탄 등 많은 시련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굴곡은 오히려 그녀의 그림에 깊이를 더했다.

 

 

 

 

붓으로 쓴 여성의 이야기

나혜석 <자화상>

 

 

① 서양화 속에 드러난 정체성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 유화 기법을 체득하였고, 조선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화전을 열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화상〉(1928)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검은 한복 차림에 단호한 표정의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는 이 그림은, 자신을 당당히 직시하고 시대를 향해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자화상은 전통적으로 남성 화가의 영역이었지만, 나혜석은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직접 묘사함으로써 그 틀을 깼다. 이는 단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도 자신을 표현하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나혜석 <파리 풍경>

 

 

② 여성의 시선으로 본 풍경

나혜석은 유럽 여행 중 그린 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파리 풍경」 등은 감상적이거나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여행자로서의 여성 화가가 세상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사회의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체로 묘사된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여성이 느끼는 정체성과 감정을 그려내려 했다.

 

 

 

글로 표현한 페미니즘

나혜석은 그림만큼이나 글에서도 솔직하고 과감했다. 특히 1934년 발표한 〈이혼고백서〉는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남편 김우영과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억압과 위선을 신랄하게 폭로한 이 글은 지금으로 치면 ‘고발문’에 가까웠다.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그 사람의 소유물인가?”
“나는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여성이 사랑할 자유, 이혼할 권리,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할 당위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녀의 글은 단순한 체험담이 아니라, 당대 조선 사회에 대한 통렬한 페미니즘 선언이었다.

 

 

 

외면받은 예술, 잊힌 이름

나혜석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그녀의 그림과 글은 ‘여자가 할 일’의 범주를 넘어섰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혼 후 여성계에서도 외면당했고, 예술계에서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다. 1948년, 그녀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예술과 사상은 이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최근에는 그녀의 작품이 재조명되며 전시회와 학술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나혜석: 다시 태어나는 여인’ 전시가 열리며 그녀의 예술과 삶을 재조명했다.

 

 


 

 

 

나혜석은 그림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했고,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녀의 예술은 단순한 형식이나 기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도구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삶을 통해 ‘여성 예술가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녀는 시대에 묻힌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살아있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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