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국제 미술계의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한국 현대미술이 2010년대 이후 뜨겁게 재조명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흐름이 바로 단색화다. ‘단색화’는 말 그대로 ‘한 가지 색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회화’를 뜻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적 미의식, 수행성, 물성과 시간의 흔적을 깊이 품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단색화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을 짚어본 뒤,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단색화란 무엇인가?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에서 등장한 회화 사조로, 한 가지 색을 사용해 화면을 반복적으로 긁고, 덧칠하고, 밀어내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회화다.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단색화는 단순한 형식의 미학을 넘어 ‘행위’와 ‘시간성’, 그리고 ‘동양철학’을 기반으로 한 회화다.
화면 위에 흘러내리는 물감, 겹겹이 덧발린 질감, 천천히 반복된 손놀림은 마치 묵상하듯 오랜 시간의 흐름을 고요하게 드러낸다. 서구의 추상 표현주의가 ‘폭발’이라면, 단색화는 ‘침묵’이다.
2. 단색화의 탄생 배경
1970년대의 한국은 군부독재와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 사회적 억압과 혼란이 공존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은 격렬한 감정의 표출보다는 내면으로 침잠하는 예술 언어를 택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집중하며, 화폭 위에 수행하듯 손길을 쌓아갔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레 서구 모더니즘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예술철학 — 선(禪), 무위자연, 공(空)의 개념 — 과 맞닿았다. 단색화는 바로 그 정점에서 탄생한 한국적 추상의 집약이다.
3. 주요 단색화 작가들
① 박서보 (1931~2023)
“묵묵히 그리는 것이 곧 인생의 수행이다.”
단색화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그는 ‘Écriture(에크리튀르, 글쓰기)’ 시리즈로 유명하다. 마치 아이가 한자 획을 반복하듯 연필로 물감 위를 긁어내며 화면을 채워간다. 반복의 행위는 하나의 기도요, 삶에 대한 성찰이다. 박서보의 작업은 인내, 절제, 명상을 상징하며, 단색화의 수행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② 윤형근 (1928~2007)
“청색과 갈색은 하늘과 땅의 색이다.”
윤형근은 안료를 먹물처럼 번지게 하여 캔버스에 색을 스며들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경계를 암시한다. 그의 단색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수묵화의 정신성과 더불어, 화면 속 여백의 미와 음양의 조화를 깊게 느낄 수 있다.
③ 하종현 (1935~)
“물감을 캔버스 뒤에서 밀어낸다.”
하종현의 대표 시리즈는 ‘접합(Painting-Unity)’이다. 일반적인 회화 방식과 달리 그는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듯 발라 앞면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이 ‘뒤집힌 행위’는 물성과 공간감, 그리고 행위의 반전성을 통해 추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구조 자체에 도전하는 실험이자, 한국적 수행미의 재해석이다.
④ 정상화 (1932~)
“균열은 삶의 흔적이다.”
정상화는 캔버스 위에 균열(Crack)을 형성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유명하다. 반복적으로 흰색 물감을 덧발라 마르고 또 마르며, 화면에는 자연스러운 갈라짐이 생긴다. 이 균열은 결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삶의 흔적을 담은 텍스처다. 단색이라는 제한된 색 속에서 깊은 감성의 울림을 끌어낸 작가다.
⑤ 이우환 (1936~)
“점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
이우환은 단색화의 범주에 한 발을 담그고 있으나, 좀 더 철학적·개념적인 접근을 한다. 그의 ‘선으로부터(From Line)’, ‘점으로부터(From Point)’ 연작은 선과 점을 반복적으로 찍거나 긋는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 행위와 여백, 물질과 무형성이 그의 회화의 핵심이다.
4. 단색화, 세계 미술계를 흔들다
단색화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 등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서구 미술계는 단색화의 미니멀한 시각 언어와 동양 철학이 결합된 방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박서보와 윤형근의 작품은 동양적 사유의 시각화로 호평받았으며, 아시아 미술의 새로운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도 다수의 단색화 작가들은 세계 유수 갤러리와 아트페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5. 단색화의 현재와 미래
단색화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사조가 아니다. 지금도 많은 현대 작가들이 이 정신을 계승하거나 변형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 아트, 설치미술, 디지털 아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단색화적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단색화의 힘은 소리 없이 깊이 스며드는 울림에 있다.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시대에, 이 단순하고도 고요한 회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얼마나 천천히 보고 있는가?”
단색화는 단순한 모노크롬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 행위, 철학이 결합된 고요한 언어다. 그 안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작가들의 내면성, 그리고 동양적 무위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마주할 때, 단순히 ‘색’을 보려 하지 말자. 그 안에 담긴 반복된 손길과 비움의 정신, 고요한 떨림을 느껴보자. 그것이 단색화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가치다.